
〈경도를 기다리며〉를 다 보고 나서
이 드라마를 보고 나서 한동안 아무것도 바로 쓰지 못했다. 좋았냐고 묻는다면 좋았다고 말할 수는 있는데, 추천하냐고 물으면 쉽게 고개가 끄덕여지지는 않는다. 그만큼 이 작품은 친절하지 않고, 또렷한 감정을 대신 남겨주지도 않는다. 대신 이상하게도, 며칠이 지나고 나서 문득문득 장면이 떠오른다. 누군가를 기다리던 얼굴, 말하지 않고 넘기던 순간들. 아마 이 드라마는 그렇게 남는 걸 목표로 만든 것 같다.
1. 줄거리 ― ‘아무 일도 안 일어나는 것처럼 보이는’ 이야기
〈경도를 기다리며〉는 처음부터 큰 사건을 던지지 않는다. 누군가 실종됐다거나, 관계가 극적으로 파탄 난다거나 하는 일도 없다. 대신 이 드라마는 이미 어딘가 어긋나 있는 상태에서 시작한다.
주인공은 경도를 기다린다. 정확히 말하면, 지금도 기다리고 있는 건지, 아니면 그냥 기다리는 사람으로 남아버린 건지조차 확신하지 못한 채 살아간다. 연락은 드물고, 약속은 흐릿하다. 그렇다고 완전히 끊어진 것도 아니다. 이 애매한 상태가 이 드라마의 전부다.
이야기는 주인공의 일상을 따라간다. 출근하고, 사람을 만나고, 식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온다. 그 과정에서 특별한 설명은 없다. 감정은 직접 말해지지 않고, 늘 조금씩 비켜서 있다. 그래서 처음 몇 회는 솔직히 “이 드라마가 뭘 하려는 건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계속 보다 보면 깨닫게 된다. 이 드라마는 ‘무언가를 보여주려는 것’이 아니라, ‘이 상태를 같이 견디게 하려는 것’이라는 걸. 경도를 기다리는 시간이 어떤 식으로 하루를 잠식하는지, 그리고 그 기다림이 어느 순간부터는 대상보다 기다리는 사람 자신을 붙잡고 있다는 사실을, 아주 천천히 드러낸다.
2. 인물 ― 말을 아끼는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밀도
● 기다리는 사람
주인공은 감정을 설명하지 않는다. 보통의 드라마였다면 여기서 울거나, 분노하거나, 관계를 정리하는 장면이 나왔을 텐데, 이 인물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대신 아무 일 없는 얼굴로 하루를 살아간다. 누군가 “괜찮아?”라고 물으면 고개를 끄덕이고, 혼자 있을 때도 크게 무너지지 않는다. 이 모습이 오히려 더 현실적으로 느껴진다. 실제로 우리는 대부분 그렇게 산다. 기다리면서도 일은 하고, 웃기도 하고, 아무렇지 않은 척한다.
이 인물의 가장 큰 특징은 결단하지 못하는 태도다. 떠나지도 못하고, 완전히 남지도 못한 상태. 이 드라마는 그걸 단점으로 몰아붙이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상태로 살아가는 사람이 지금 이 시대에 얼마나 많은지를 조용히 보여준다.
● 경도 ― 얼굴보다 이름으로 남은 사람
경도는 자주 등장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계속 느껴진다. 이 인물은 하나의 캐릭터라기보다, 주인공이 놓지 못한 시간, 혹은 감정의 이름처럼 보인다.
그래서 ‘경도를 기다린다’는 말은 결국 누군가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그때의 나, 그 관계의 상태를 기다리는 말처럼 들린다. 드라마는 이 점을 굳이 설명하지 않는다. 설명하지 않기 때문에 더 오래 남는다.
3. 캐릭터의 매력 ― 과장하지 않는 감정
이 드라마의 인물들은 불행을 크게 소비하지 않는다. 상처를 서사로 만들지도 않고, 감정을 클라이맥스로 끌어올리지도 않는다.
그래서 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답답할 수도 있다. “왜 저렇게 가만히 있지?” “왜 확실하게 정리하지 않지?” 나도 보면서 몇 번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끝까지 보고 나니, 그 답답함 자체가 이 드라마의 핵심이라는 생각이 든다. 현실의 관계가 그렇듯, 대부분의 기다림은 명확한 이유도, 결론도 없이 이어진다. 이 작품은 그 불편한 진실을 포기하지 않는다.
4. 연출 ― 시간을 찍는 드라마
연출은 분명히 느리다. 컷은 길고, 음악은 절제되어 있으며, 카메라는 인물을 재촉하지 않는다.
처음에는 이 느림이 장벽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는 “아, 이 드라마는 서두를 이유가 없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기다림을 다루는 이야기에서 속도감이 있을 필요는 없으니까.
특히 인상적인 건, 아무 말 없이 흘러가는 장면들이다. 창밖을 보는 시간, 휴대폰을 내려놓는 순간, 이미 끝난 대화를 다시 떠올리는 얼굴. 이런 장면들이 쌓이면서 관객도 자연스럽게 주인공의 리듬에 맞춰진다.
기다리는 감정의 속도를 그대로 유지하려 한다.
5. 다 보고 나서 남는 것
〈경도를 기다리며〉는 명확한 결론을 주지 않는다. 관계가 끝났는지, 이어질 수 있는지, 주인공이 앞으로 어떤 선택을 할지는 분명하게 말해주지 않는다.
대신 이런 질문을 남긴다.
- 우리는 왜 끝났는지도 모르는 관계를 붙잡고 있을까
- 기다림은 사랑일까, 아니면 익숙함일까
- 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리며, 우리는 얼마나 변했을까
이 질문들이 엔딩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이 드라마는 다 보고 나서야 비로소 시작되는 작품처럼 느껴진다. 화려하지도, 강요하지도 않지만, 조용히 오래 남는다.
※ 스포일러를 최소화한 상태에서, 실제 시청 후 감상을 중심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